1993년 개봉한 영화 는 사이버펑크 영화의 대표작으로서 복제인간 ‘리플리컨트’와 인간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근미래를 그리고 있다.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해 ‘저주받은 걸작’으로도 불리는 이 영화의 백미는 두 진영의 싸움보다도 주인공이 사랑하게 되는 레이첼, 즉 자신이 리플리컨트라는 사실을 모를 뿐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도 그저 인간으로 보이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향해 던지는 아이러니에 있다.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를 판별하는 테스트에서 그녀는 오히려 인간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기묘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김영사 2022)에서 고유의 역사와 주체성을 간직한 타자로서의 사물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에 가까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괘종시계나 가죽구두 따위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정보에 연결되도록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텅 빈 객체들이다. 그것들은 도처에 널려 있고,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매끄럽고 ‘스마트’하게 처분 가능한 정보로 모든 것을 환원한다. 세계가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는 전능감에 가까운 착각은 역설
책이나 인터넷을 뒤적이다 보면 주워 모으게 되는 잡다한 상식 중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우리 몸이 ‘선택적 불용’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가령 왼쪽 시력을 아끼겠다고 오른쪽 눈만 뜨고 다닌다면 외려 몸은 왼쪽 눈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왼쪽 시력을 퇴화시켜버린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몸의 학습 능력은 우리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곤 한다. 몸이 망가지거나 노화하면서 얻게 되는 갖은 통증들이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잠복해 있다가 치료 과정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경험은 또 어떤가. 그 통증들을 항시 액면 그대로
임상 심리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처럼, 혹은 한 명의 타인처럼 객관화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슬픔이나 상처에 매몰된 이는 거기에 잠식된 사고를 통해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그 속으로 더욱 깊이 침잠하는 악순환에 시달리게 된다. 따라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거리를 두는 훈련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오은경 시인의 『산책 소설』(현대문학 2021)은 흡사 이러한 임상 심리 훈련의 과정처럼 보인다. ‘소설’이라는 표제를 가장한 시들은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흔쾌히 드러내지는 않겠다는 듯
얼마 전 들었던 기묘한 이야기 하나. 최근 출판계의 불황은 팬데믹 기간 동안 외국인의 입국이 제한되면서 외국인 노동자 위주로 돌아가던 인쇄소가 하나둘 문을 닫게 되어 벌어진 일이라는 것. 얼마 전 보았던 기묘한 풍경 하나. 택시를 타고 광주 시내를 지나는데 길 한복판 공사장에 안전에 유의하라는 문구가 한국어, 태국어, 아랍어로 적혀 있었던 것. 책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상품의 생산라인에 외국인 노동자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도심 한복판에서 상점 간판이 아닌 공사장 현수막에서 외국어와 마주치니 낯설었다. 사무노동은 점점 더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영상매체와 상업광고는 삶을 무한한 가능성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꾸준히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삶이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삶은 제아무리 가능해 보이는 것도 돌연 불가능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능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을 일상으로 체화하도록 영원히 채찍질하는 가혹한 존재이다. 그런 삶을 시로 옮기는 일이란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삶의 동물적인 본능을 긍정하고 풀어놓는 일과도 같다. 김명기 시인의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걷는사람 2022)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처연함을 둘러 입
‘별세계’라는 단어를 보면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우선 그것은 별의 세계, 혹은 별이라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계와는 별개로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혹은 별의별 세계, 즉 하나같이 별스러운 여럿의 세계를 뜻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유림의 시집 『별세계』(창비 2022)는 이 중 무엇에 가장 가까운 세계일까.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답이겠지만 시집을 뒤적이다 보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의미에 좀 더 근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이 세계와 별개의 세계인
어둡고 음습하지만 짓궂고 천진난만하다. 밤과 어둠, 죽음과 유령, 무한과 추상, 아이와 유머. 함기석의 시세계를 마주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세계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투명하리만치 검은 유희의 난장을 아무런 제어장치도 없이 눈앞에 펼쳐놓는 것이 곧 시라는 듯이. 함기석의 최근 시집 『음시』(문학동네 2022)는 그러한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시인은 양이 아닌 음을 지향하며 세계의 이면, 존재의 밑바닥, 언어와 관념의 기저를 두루 탐색한다. 음을 지향하는 시는 시인의 말처럼 “산 자의 죽은 말과 죽은 자의 죽지 않는 말 사이”를 표
강물의 유속이란 구간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상류에서는 급류가 형성되어 쉼 없이 물이 쏟아지는가 하면 하류에서는 마치 흐름이 멈춘 것마냥 유속이 느려진다. 현재라는 시간은 강의 하류처럼 영원히 고여 있을 것만 같은 정체 구간으로 감각된다. 하류에서 보기에 상류는 아득히 멀리 있어 쏟아져 내려오는 물의 속력을 미처 가늠할 수 없는 한편, 바로 옆에 쌓여 있는 모래 둔덕의 황량하게 반짝이는 모습에는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이병국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일은 어디쯤인가요』(시인의일요일 2022)는 이처럼 멈춰있는 듯한 현재의 느린 유
시는 때로 현실과 전혀 다른 시공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신용목 시인의 시집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문학동네 2021) 속 세계는 물과 어둠에 고요히 잠겨 있다. 시인은 물속에서 느리게 유영하는 사물들을 바라보며 거기에 투영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둠 속에 잠긴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오는 자신을 지켜보기도 한다. 그렇게 잃어버린 나, 나를 벗어나 홀연히 떠돌던 나가 다시금 되돌아와 나를 두드리는 시간들과 시인은 마주하고 있다.존재의 근원이기도 한 물에 잠긴 세계는 존
사랑은 관계의 가장 추상적인 단계를 의미하고, 종교는 믿음의 가장 추상적인 단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종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관계에 대한 맹목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상태에 도달함을 의미하리라. 이병철 시인의 시집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걷는사람 2021)를 읽다 보면 사랑에 대한 믿음이 백색에 가깝게 추상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랑에 대한 시인의 면밀한 시적 탐구는 세속적인 단계의 사랑을 넘어 거대한 스케일의 세계를 끌어안는다. 시는 이 거대한
시가 일상의 건조하고 삭막한 언어와 달리 다채로운 이미지로 구성된 언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리산 시인의 시집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창비 2017)는 무성한 이국풍의 이미지로 꾸려진 한 권의 테마파크와 같다. 그러나 이 테마파크는 세속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독과 쓸쓸함을 위한 것에 가깝다. 시인은 지금 여기와 사뭇 다른 시공으로 읽는 이를 훌쩍 데려다놓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곳에서 독자들은 낡은 회전목마, 녹슨 관람차 따위가 버려진 황량한 풍경을 마주할 것이다.철 지난 그